'유어예(游於藝) '란 무엇인가? 

서정걸

   2002.9.6~15까지 동서양의 작가들이 만나 열띤 경연을 벌인 세계도자기엑스포 개최 1주년 기념 "2002 국제도자워크샵"의 주제인 '유어예(游於藝)'란 무엇일까....?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도자기의 진정한 매력은 생활 속의 예술이란 점이다. 도자기는 삶의 유용한 도구로서 인류와 함께 해온 가장 오랜 예술장르의 하나다. 도자기는 인간의 미적 재능을 가장 순수하게 담고 있다. 생활 속에서 창작의 욕구가 생성되고, 생활과의 관련 속에서 디자인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즉, 도자기는 인간의 미의식과 삶의 양식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근대 이전에 도자기는 거의가 익명의 예술가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시대를 대표하는 수많은 명품들에도 도공의 이름이 없다. 그것을 소장하는 사람들은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왔지만 정작 그것을 만든 작가는 언제나 미상(未詳)이다. 그러므로 대가들을 배출해온 다른 장르에 비해서 도자기는 전혀 권위적이지가 않다.

   도자기가 갖는 또 하나의 매력은 우연성이다. 자연의 조력없이 도자기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도예가에 의해 형태를 얻은 흙은 뜨거운 불과 공기의 조화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다. 흙과 불과 인간의 정신이 화합하여 만들어 내는 특별한 예술 분야인 것이다. 인간의 정신과 자연의 숨결이 만나서 도자기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도자는 아주 매력적인 예술이다.

   흙을 재료로 하는 도자기는 손의 감각을 아주 민감하게 반영한다. 선사시대의 도공이나 현재의 도예가나 손끝의 미세한 감각으로 흙을 빚는다. 그것을 빚는 순간 도예가는 흙과 하나가 된다. 그때에 정신이 흙 속에 스민다. 순수한 자연인 흙은 인간의 심성을 가장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재료이다. 자연과의 동화를 이루고, 예술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동양적 사고를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것이 도자기인 것이다.

   한국에서 도자기를 이야기할 때 '손맛'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손맛은 기술과는 다른 개념이다. 그것은 감각이란 단어와 유사한 의미로도 쓰이지만 보다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맛>이라는 단어는 음식에서 느껴지는 달거나 맵거나 한 감각을 이르는 말이지만, 한국에서는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에서 느껴지는 느낌이나 기분'을 말할 때도 자주 쓰인다. 어떤 작품에서 예술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는 예술적 느낌이 풍부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틀로 찍어낸 상품(제품)에서는 손맛을 느낄 수가 없다. 도자기 역시 흙을 빚을 때 인간의 손길을 느낄 수 없는 상태까지 완전히 가공하여 흙의 특성이나 재료가 가진 물성(物性)을 완전히 제거했다면 예술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을 제거한거나 마찬가지다. 한국의 옛 도예가들은 그들의 익숙하고 감각적인 손길로 문지르거나 깍거나 두드리거나 할 때 생겨나는 리듬을 지워버리지 않고 작품에 그대로 내버려 둔다. 그러한 흔적들은 흙이 지닌 자연의 성질을 드러내준다.

   기술만 뛰어나고 감각이 둔한 예술가는 결코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없다. 때로 기술이 너무나 뛰어나 감각이 묻혀버리는 경우가 있다. 대체로 중국의 도자기들에서 그런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의 예술가들은 완벽한 테크닉으로 재료(자연)를 제압한다. 재료가 지닌 고유한 성질을 인간 감성의 영역으로 완전히 끌어들이는 것이다. 반면에 한국의 옛 도자에는 인간의 감성과 자연의 성질이 공유되어 있다. 형태와 색채와 문양의 기교에 있어서 완벽함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인해 중국의 정교한 도자기들에서는 손맛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에 비해 한국의 도자기는 기교보다는 감각이 돗보인다. 즉 손맛이 잘 드러난다. 그래서 자연 친화적으로 보이며, 정감이 간다. 정교한 테크닉과 손맛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안다면 도자기를 보는 안목이 이미 수준 급이라 할 것이다. 손맛을 낼 줄 아는 도예가는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예술가이며, 손맛을 느낄 줄 아는 감상자 또한 예술 속에서 즐거음을 찾을 수 있는 진정한 감상자이다. 즉 游於藝를 아는 것이다.

   동양의 예술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기운생동(氣韻生動)이다. 기운생동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작품이 지니고 있는 생명력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개념이다. 기운생동하지 않는 작품은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예를 들어 말이나 새를 그리면 살아 있는 듯 해야하고, 아무리 유사하게 그려도 박제 같은 느낌이 난다면 그것은 좋은 작품이랄 수 없다. 따라서 기운생동은 모든 예술에 적용되는 동양예술의 핵심 개념이다.

   흙으로 빚어 불에 구워낸 도자기 역시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자연으로 창조된 것이어야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교가 아무리 뛰어나도 완성된 작품에서 생명력을 느낄 수 없다면 죽은 나무를 보는 것과 같다. 살아 있는 나무 옆에 병들어 죽은 나무가 같이 있다면 그 둘에서 느껴지는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생명이 없으면 교감할 수 없다. 교감을 주지 못하는 도자기는 거리의 리어카에 실려 다닐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다. 반면에 보석 같은 도자기는 비단 보자기에 싸여 금고에 보관되거나 박물관의 고급진열장 속에서 조명을 받는다.

   도자기에 담겨 있는 동양의 미학과 예술정신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동서의 미술개념이 혼합되고 새로운 개념이 생겨나고,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는 복잡한 상황이지만, 동양의 도자예술에 담긴 정신은 아직도 가치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워크샾은 동양의 도자예술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예술정신이 무엇이며, 그것이 현대 도자 예술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를 탐구해보는 의도를 가지고 기획되었다.

   오늘날 현대도자는 그 영역을 확장하고 순수미술로서 발전하고 있다. 20세기 후반, 많은 선구적인 도자 예술가들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도자 예술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왔다. 그럼에도 도자는 아직 마이너 장르로 인식되고 있다. 20세기 초 많은 화가들이 원시미술에서 영감을 받아 현대미술의 문을 열었던 것처럼, 현대 도자예술 분야에도 새로운 도약을 촉발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발전과 변화에 필요한 개념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이번 워크샾은 동양도자의 예술정신이 현대 도자의 발전에 촉진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는 신념으로 기획되었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말이 있다. '옛 것을 본보기로 삼아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자'는 의미이다. 동양의 예술정신은 노자(老子)철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노자가 말하는 자연관과 우주관은 동양예술의 발전에 원동력이었다. 여기서 제시한 유어예(游於藝)는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로 이 워크샾의 주제로 삼은 것은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다. 직역하면 '예술의 세계에서 노닌다'는 뜻으로 동양의 예술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삶의 가장 이상적인 단계를 예술세계로 본 것이다. 예술을 알고 예술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 생활 속에 예술을 끌어들이고, 예술 속에 생활을 담아내는 것, 그것이 유어예(游於藝)의 세계이다.

   흙을 가지고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흙은 어떤한 형태도 다 수용한다. 흙을 만지다 보면 자연에 동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도예가는 아니지만, 흙에 대해 무한한 매력을 느끼고 있다. 흙으로 예술을 하는 도예인들은 모두 유어예(游於藝)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 '2002 국제도자워크샵'도록 서문(세계도자기엑스포 전시부장 서정걸 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