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오브제도자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2018-04-05 (목) 11:37 조회 : 342

오브제도자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윤두현 독립큐레이터, 정소영 갤러리 객원디렉터


 오브제의 도입은 곧 미술에 대한 근대적인 믿음, 나아가 예술 자체에 대한 근본적이며 도발적인 의문과 함께 현대미술의 새벽을 여는 큰 사건의 하나였다. 피카소는 오브제의 첫 출발을 알렸으며, 뒤샹의 오브제는 예술 자체를 회의함으로써 개념미술의 새로운 장을 여는 촉매제가 되었다. 오늘날의 미술에서 아주 자연스럽거나 혹은 진부한 것으로까지 받아들여지는 오브제는 적어도 그 시작에 있어서만큼은 도전이었으며, 개척이었다. 다른 한 편으로 도자예술에서의 오브제 개념 도입 역시 공예품으로써의 도자에 대한 전통적 관념에 새로운 논의점을 제시한 사건이었다.

 본 글에서 필자는 도자오브제의 이런 점에 근거하여 이에 대한 미학적 논으를 시도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용어의 무게만큼이나 도자오브제에 대한 미학적 접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뿌리가 공예의 장이 아닌 미술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도자오브제를 공예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미술의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전제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도자의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면 그 어려움은 더욱 가중된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을 논의하기에 본 지면은 적절치 않다. 따라서 여기서는 오브제의 출현배경과 미학적 동기가 동시대 도자오브제에서 어떻게 반영되어 왔으며, 그 의미와 과제는 무엇인지를 살펴본즌데 그 목적을 두고자 한다.


우선 여기서 간단하게나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개념의 정확한 의미이다. 사전적으로 정의된 오브제의 의미는 물체, 물건 또는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을 지칭한다. 미술 안에서 오브제는 물질적 대상을 뜻하면서 동시에 정신적인 것까지 포함하는 상당히 미묘한 의미의 복합성을 안고 있다 대체로 이는 예술 안에서 오히려 물체, 대상이 품고 있는 기존의 의미를 전용하는 일차적인 차원을 넘어 아예 그 대상을 거부하고 대상 자체의 물질성이나, 정신성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뒤샹은 예술과 오브제 자체를 동일화시켜 그의 '반예술 개념'을 실천하기도 했다. 현대 도예에서의 오브제 개념은 주로 1950년대를 전후하여 미국의 볼커스 등에 의해 촉발된 추상표현주의적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이후 팝아트에 이르기까지 현대미술의 중심 흐름과 궤를 함께하며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1980년대 이후 한국현대도예의 두드러진 양상으로 자리 잡은 도자오브제는 주로 미국에서 전개된 추상표현주의나 미니멀리즘의 토대로 이루고 있는 모더니즘적 사유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외에도 펑크도자, 수퍼오브제, 사실주의적 도자 등 이후의 전개된 다채로운 양상들이 그와 함께 공존했다. 그리고 이는 90년대 중후반까지 한국현대도예의 중심에 자리하였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그같은 양상은 미술 나아가 사회적 인식의 전개와 밀접한 상호작용 속에서 이뤄진 미국과 달리 적절한 유보나 반성 없이 일방적으로 수용되어 결과적으로 많은 부작용을 남기고 말았다. 즉 양상의 본질을 수용하기보다 결과의 모방에만 치우쳤다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최근 미술의 전반적인 양상은 전위적 형식이 아니라 회화, 그것도 이미 시효만료 됐다고 생각했던 구상회화가 다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도예계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조형 도자 분야는 날로 위축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으며, 오히려 전통도자를 현대적 감성으로 재해석한 도자, 즉 공예적 도자가 다시 주목받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왜 '도자오브제'에 대하여 논의 해야 하고 또 그것의 무엇을 고민홰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말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앞으로 현대도예가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와도 같다. 즉 이야기의 초점은 오브제도자가 무엇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어야 한는가에있다.

공예인 도자가 공예이기를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제 전방위적인 차원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사실 앞서 오브제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제대로 실펀하는 것이 어쩌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반전토으 탈장르 등이 오브제 미학의 본질적 개념임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기존의 어떤 믿음이나 경향에 대한 철저한 의문제기와 반성이 그것이다. 나아가 이는 예술 자체뿐 아니라 삶으로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한다. 결국 각각의 작품이 우리의 예술과 삶에 어떻게 소통될 수 있으며, 환원될 수 잇을 것인가 뼈아프게 고민하는 데서부터 비로소 그것은 출발될 수 있다.

현재로서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애포의 도자오브제 작업을 일관되게 지속하고 있는 작가를 찾기란 쉽지 않다. 아니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세대를 이어가며 다양하개 전개되고, 그에 따라 우리 고유의 조형언어를 획득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미술사란 어떤 면에서 반전의 역사다. 끊임없는 반작용으로 인하여 전진을 위한 원동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삶과의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어야 한다. 아서 단토는 그의 저서 <예술의 종말 이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삶의 형식이라는 표현은 물론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하나의 언어를 상상하는 것은 하나의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런데 동일한 말을 예술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하나의 예술작품을 상상하는 것은 그 안에서 이 작품이 어떤 구실을 맡고 있는 어떤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이다. ...예술미가 의미를 갖게 되는 삶의 형식이 없다면, 미학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대단히 외적인 게 되어서 그러한 예술의 목적과 요점이 과연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심각하게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제 어떤 방향으로든 그렇게 가야한다는 정해진 방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렇지만 현대미술이 부정적 회의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칸트를 위시한 선각자들이 그랬듯이 예술을 정의하는게 있어서 인간의 삶의 관점이 필요하다. 도예오브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경국 도예오브제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우리의 삶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즉 우리의 삶 안에서 예술로서의 오브제 도예는 무엇인가로 말이다. 그체적으로 동시대의 삶의 양상을 면밀히 반성하고, 그에 대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 또는 어떤 유쾌한 미적체험으로서 그들의 삶에 청량제가 되는 것 등이 예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월간도예 Vol. 12 No. 140, pp.51~53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