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공예란 무엇인가
2018-11-28 (수) 14:50 조회 : 181

공예란 무엇인가

 

하워드 리사티

 

서론 

지난 30년간 공예와 순수미술의 관계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러한 논의는 1961크래프트 호라이즌 Craft Horizon지에 실린 로즈 슬리브카 Rose Slivka새로운 도자의 출현 New Ceramic Presence이라는 글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글에서 슬리브카는 새로운 도자의 출현을 근대산업문화 그리고 당대 회화의 새로운 흐름과 관련지어 설명하였다. “화가 같은 도예가인 그들은 기능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회피한다. 그럼으로써 사용의 의미가 부차적인 혹은 임의적인 속성이 되었다.”고 그녀는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것이 공예인가라는 필연적 질문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에 슬리브카는 기능에 관한 개념과 모든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는 한, 그것들은 공예의 영역에 남아있다.”고 대답했다.

슬리브카의 글은 순수미술과 비교하여 공예가 가진 위상에 대한 광범위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그러한 논쟁은 이후 수십 년간 미술경매시장에서 순수미술 특히 회화 분야가 천문학적 가격으로 거래되는 사실에 자극을 받아 더욱 확대되었다. 2003년 런던 테이트 갤러리가 수여하는 터너상을 수상한 연국 도예가 그레이슨 페리는 도자기는 회화보다 유서 깊은 역사를 지녔다. 그러나 경매장의 어마어마한 거래 가격을 보면 회화가 큰돈을 번다.”고 말한 바 있다.

치솟은 미술품 가격을 80년대 경제 활황’, 90년대 벤처거품혹은 지난 몇 년간의 또 다른 호황 덕분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순수미술이 가진 특권적위상 역시 중요한 요인이었다. 순수미술이 특권적 위상을 갖는 데에는 족히 한 세기를 넘는 기간 동안 신문, 잡지, 학술지에 실린 현대미술에 관한 비평담론이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비평담론들은 회화와 조각은 물론 건축까지 순수미술이라는 지성의 세계로 편입시켰다. 비평담론의 바탕에 깔린 미학이론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으며, 18세기에 알렉산더 바움가르텐 Alexander Baumgarten, 에드먼드 버크 Edmund Burke,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와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새 생명을 얻었다. 이러한 이론적, 비평적 담론은 순수미술을 단순한 상품이나 수공품이 아닌 개념적이고 지성적인 행위로 변모시키기 위한 지적인 토대를 제공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공예 분야는 순수미술이 거친 지성화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고, 순수미술에 개념적 속성을 부여한 비평적, 이론적 담론의 뒷받침을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받지 못했다. 이론적이고 지적인 방법론을 구사하는 공예평론가들이 전무한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여전히 공예에 관한 이론적 담론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이에 관해 미술 몇 공예평론가인 자네 코폴로스 Janet Koplos는 도예가협회 강연에서, “공예평론가들은 비이론적인 경향이 있다. 그들은 대개 공예를 역사적 흐름으로만 설명하거나, 혹은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사실만을 중시하여 글을 쓴다. 그것이 공예 분야가 대체로 비이론적이라는 사실의 원인인지 결과인지는 잘 모르갰다.”고 지적했다. 또한 코폴로스는 공예가 순수미술의 지적 구조를 모방하는 것이 과연 보템이 되는 일인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고 곧이어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스스로 답하면서, “순수미술과의 동등함을 갈망하는 것은 실상 공예에 해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코폴로스는 공예가들에게 공예성을 지켜라, 특히 공예가 주류의 순수미술과 다른 점을 유지하라고 격려한다.


중략

    

 내가 말하려는 요지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예품을 규정할 때 기능을 가진 것 혹은 특정 재료(예를 들어, , 나무, 섬유, 금속)로 만들어진 것으로 단순하게 바라보지 말고, 그것을 뛰어넘는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공예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럼으로써 공예를 이해하고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를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항상 가다머가 말하는 게임이라는 구조적 한계 안에서 일어난다. 게임은 관습이나 규칙의 체계 혹은 구조적 틀을 의미한다. 이는 촉구나 권투와 같은 일반적인 게임의 규칙일 수도 있고, 미술가나 소설가가 활용하고 관객이나 독자가 인지하는 규칙이나 관습일 수도 있다. 촉구나 권투의 게임 규칙을 알아야만 게임이 통제 불능의 마구잡이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규칙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는 이들과 달리, 규칙을 아는 사람은 전문해설자의 도움 없이도 규칙에 의해 구성된 형식구조 내에서 게임을 즐기고 그 핵심적 내용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의미가 필연적으로 관습과 규칙 체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물의 형태 지각적 측면(그것이 어떻게 보이는지)은 물론 그 개념적 측면(그것이 무엇인지) 둘 다에 적용된다. 이 두 가지 측면은 흔히 형태와 내용혹은 실기와 이론이라는 양극단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 같은 이분법적 구분은 둘 사이의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왜곡한다. 단순히 보고 듣는 것과는 다른 아는 것 그리고 이해하는 것은 사물의 형태나 개념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예술을 포함한 모든 의사소통 체계에 필수적이자 상호의존적이다. 가다머는 “(그림에) 무엇이 재현되었는지 인지해야만, 그림을 읽을수 있다. 그 과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그 사물을 그림이 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앞으로 논의하게 될 공예와 순수미술의 관계에 있어서 그러한 가다머의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공예와 순수미술을 인지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우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단계에서 출발해야 함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퇴근 후 애완견을 산책시키면서 인사를 주고받는 정도의 친분을 가진 이웃을 알아보는 수준이라면, 공예와 순수미술을 인지하는 데에는 형태적 외관 정도만 알면 된다. 이는 길을 가다 연예인과 마주쳤을 때 발생하는 인지 정도와 비슷하다. 가다머가 말하는 차원에서 안다는 것은 보다 깊고 심오한 단계까지 아는 것이다. 그러한 이해의 단계에 도달해야만, 의미가 작가에 의해 형태로 구성 될 수 있고 또 관객에 의해 이해될 수 있다. 모든 시각예술에서 의미의 발생은, 작품의 형태가 기대고 있는 개념적 바탕을 알고 이해하는 데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어떤 것(예를 들어 공예품)의 성질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그것 자체를 알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즉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왜 만들어졌는지, 역사적 전통 안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등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순수미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회화나 조각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어떻게 회화나 조각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며 또 어ᄄᅠᇂ게 그것을 보고 반응할 수 있겠는가? 이 같은 질문은 너무 당연해서 바보 같이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미술의 역사를 보면 이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1917년 뉴욕에서 열린 독립미술가협회 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 전시회에 마르셀 뒤샹은 상점에서 산 소변기를 조각품으로 출품햇다. <Founatain>이라는 표제가 달린 그 작품을 본 평가자들이 직면한 문제가 바로 위의 질문이었다. <>은 당시 조각으로 인지되고 이해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지 못핸던 것이다. 애초에 전시회 주최측은 출품작을 심사하는 절차가 없을 것이라고 천명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을 전시에서 배제시켰다. <>나쁜조각품이어서가 아니었다. 주최측의 눈에 <>은 아예 조각품이 아니엇다.

그러므로 앞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공예와 순수미술에 대한 이해는, 그 형태적 특성과 공예와 순수미술이 완전히 똑같은 것이라는 동등함의 주장이 옳은지에 대한 여부는, 공예를 내부적으로 하나의 행위로서 살펴보고, 또 외부적으로 순수미술과의 연관관계를 고찰함으로써 드러나게 된다. 즉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공예가 순수미술과 똑같은 것인지, 아니면 자체만의 독특함을 가진 행위인지를 판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공예란 무엇인가 pp.51~59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