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작업시작"

1. "예술에서는 운이 없는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 운이 좋을 수도 있다. 우리의 형이상학자들께서는 이점을 이해해야 한다. 작품들은 쉽사리 실패할 수 있으며 성공하기는 극히 어렵다. 어떤 사람은 감정이 결여되어 침묵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감정이 말을 막아 침묵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그를 짓누르는 짐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그저 부자연스럽다는 감정에서만 벗어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연장이 자신을 착취하는 데에 너무 오래 남용되어 왔다는 이유로 연장을 부숴 버리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감상적인 상태로 되어야 할 의무는 없다. 패배한 것은 분명히 패배한 것이라고 못을 박아야겠지만, 그러한 패배로부터 이제는 더 이상 투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결론을 끌어내서는 안 된다" (브레히트)

2. 예술은 언제나 그것이 발전해 온 과정 속에서 고찰될 필요가 있다. 그런 과정에서는 각가지 실험 단계가 나타난다. 그 단계는 종종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시야가 협소해지기도 하며, 때로는 일면적이고 편향적인 작품들이 나다나기도 한다. 또는 한 측면에서는 자유로워지면서도 다른 측면에서는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워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흔히 형식적 창안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형식적 창안의 문제는 단지 한 측면, 한 부분을 이루는 문제일 뿐이다. 예술적 형성의 과정에는 단순히 재료와 도구를 다루는 기술이나 양식적 문제만이 아니라 작가의 일상적 삶의 과정, 세계관, 정치적 견해와 그가 속해 있는 집단적인 인간관계, 철학적, 실천적인 문제들이 복잡하게 연류되어 있다.

예술가는 물론 끊임없이 형식적 요인들을 다루어야 하며, 끓임 없이 자신이 만족스러워 하 형식을 이룩해내야 한다. 때로는 형식문제에서 너무나 커다란 어려움을 겪음으로 해서 단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형식문제에만 너무 집착함으로 해서 두 발자국 더 후퇴할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형식주의'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너무나 종종 '형식주의'에 대한 투쟁 자체가 '형식주의적'으로 이루어진다. "만일 우리가 어떤 특정한 (과거의 역사적) 형식들을 고수한다면, 형식주의에 대한 우리의 투쟁 자체도 곧 절망적인 형식주의로 되고 말 것이다" (브레히트)

'형식주의'는 '형식의 광범위하고 풍부한 사용'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를테면 '형식주의'가 서류상의 민주주의에 불과하다면 풍부한 형식은 민주주의 내실을 구하기 위해 필수적인 통로이자 장치라 할 수 있다. 삶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형식과 통로, 새로운 장치가 끊임없이 창안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테면 풍부한 '형식은 실제적인' 삶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반면, '형식주의'는 단지 '서류상'으로만 삶과 관계한다.

3. 전진희의 작품이 단지 '형식주의로만'-'서류상으로만'-삶과 관계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녀의 작품은 자신의 '개인적' 삶에 대한 충실한 독백처럼 보여질 정도로 '자신의' 삶과 밀접히 연루되어 있다. 그녀의 작품에서 '도조'의 형식은 자신의 '삶'에 다가가기 위한 충실한 통로이자 매우 적절한 장치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런 이유로 그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변화는 그녀 자신의 '젊은 날의 실존적, 형이상학적 방황으로부터 일상으로의 복귀에 이르는 개인적 삶의 편력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객관현실과는 무관하게, 오히려 현실을 낯설게 여기는 자의식의 과잉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초기의 재학시절로부터 벗어나 점차 객관세계와 타자를 새로운 눈으로 -때로는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과정을 거쳐, 자기 주변의 일상적 삶을 친숙하게 받아들이며 모든 존재와 현실의 상호의존성을 깨닫게 되는 과정으로 변모하는 80년대 10년 간의 그의 삶의 경로가 작품 속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형식, 작품의 제목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조의 형식적 장치들과 맞부딛친 그녀의 격정들이 때로는 긴밀하고 흡족하게 삼투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엉성하고 과도하게 넘쳐흘러 양쪽이 모두 해체되는 과정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한동안의 해체의 고통을 겪고 다시 자신의 삶과 작품을 추스리고 있다. 때로는 "낮 꿈"을 꾸며 "가위"에 눌리기도 하지만 허공에 "귀 대어 보며", 방안"구석구석"을 살피다가 문득, "문 밖" "뜰 건너"를 내다보고 예술을 자식의 "팔자"라 생각하면서 이른 "새벽" 일어나 군불을 다지면서 다시 "작업 시작"이라고 마음을 먹는다.

4. "자주 소옥(小玉)이를 부르지만 소옥(小玉)에겐 일이 없네 다만 낭군에게 알리는 소리일 뿐" (小艶詩)

"빈 방의 빗소리, 뭐라 할 것인가
빗소리라 한다면 아직 모르는 것
아는가 모르는가
남산도 북산도 비만 쬑쬑" (벽암록, 46칙)

5. 다시 작업을 하게 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삶이란 그렇게 고통스럽기만도 또 즐겁기만한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이 (예술 또한) 불가능한 것만도 그렇다고 또 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현상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고 감각 속에 머무르지 않고 개념 속에 머무르지 않고, 형성물 속에 머무르지 않고, 의식 속에 머무르지 않는 것.... 발생도 없고, 영원도 아니며, 단절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오는 일도 없고, 가는 일도 없는 것"

그러나 진리는 항상 구체적이고, 역사적이다. 삶의 모든 상호의존성 자체가 구체적이며, 역사적이다. 어제의 진리는 오늘의 진리와 다르며, 어제의 민중은 오늘의 민중이 아니다. "삼땡불"은 어제의 부처와 어제의 민중을 쳐다보는 "나"의 막연함 속에서가 아니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생산하며 투쟁하는 오늘의 민중들의 상호의존적인 삶 속에서, 그리고 역사를 형성하고 자기 자신을 역사 속의 폭넓은 상호의존적 그물 속에서 풍부하게 변화시켜 나가는 내일의 민중 속에서만 구체적으로 빛을 발할 수 있다. "뜰 앞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세계와 만나는 "나"속에서는 동서남북에서 내리 꽂히는 빗소리 내용과 질이 달라진다.
그 달라진 빗소리의 '질'속에서, 다른 색깔로 보이는 뜰 앞의 나무와 돌맹이 속에서 리얼리즘이 살아나게 된다. 그것은 나무와 돌맹이, 방구석과 뜰 앞의 상호의존적 인간관계만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보다 넓고 역동적인 사회적 인과관계를 발견해내며, "지배자들의 관점이 지배자들의 관점이라는 점을 폭로하며, 인류사회가 처해 있는 가장 시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포괄적인 방안들을 마련하는 계급의 관점에서 글을 쓰며, 발전의 계기를 강조하며, 구체적이면서도 추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브레히트) 이를테면 어제의 진리 속에 담겨있는 역사적 한계와 오늘과 내일의 삶 속에 깃들어 있는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포착이야말로 우리에게 보다 풍부한 형식적 장치를 창안해 내도록 만드는 동력인 것이다. 삶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넓게 변화하고 발전한다. 삶의 풍부하고 힘찬 물결을 타고 넘기에는 예술이라는 그릇은 작고 빈약할 뿐이다.

이제 다시 작업을 시작한 그녀가 '예술' 또는 '명상'이라는 작은 그릇과 그 작은 그릇에 갇힌 자신의 삶을 보다 풍부하고 힘찬 삶의 물결로 이끌어가게 될 내일을 기대한다.

미술평론가 심 광 현


팔짜(w:29cm, d:3cm, h:22cm)

귀대어 본다(w:75cm, d:3cm, h:155cm)

구석ㆍ구석(일부)(w:27cm, d:20cm, h:24cm)

낮꿈(길몽)(w:33cm, d:4cm, h:43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