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승과 순환의 구조를 통한 꿈의 표출

박경희는 우리 미술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젊은 작가이다.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한 그가 곧장 대학원으로 진학하고, 또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독일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에 우리 미술계에 알려질 수 없었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이러한 학업과정은 마치 온상에서 촉성재배된 식물처럼 정해진 공식적 법칙에 잘 적응해온 모범생 혹은 우등생을 연상시키게 한다.
토갤러리 큐레이터인 필자가 생면부지인 그를 알게 된 것도 그렇게 오래 된 일은 아니다.
애초에 도예전문 화랑으로 출발한 토갤러리가 도예전문이란 그 전문성을 벗어나 문호를 개방·확산한 후에도 전통적인 도예와 실험적인 흙작업의 저변확대와 질적 성장을 위해 나름대로의 노력을 투여해 왔던 만큼 흙을 매재로 하는 많은 작가들이 이 화랑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작가들 중의 한 분의 소개로 박경희를 알게 되었고 또 토갤러리에서의 개인전도 기획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토갤러리가 지난 정월 말경, 예상하지 않은 화재로 전소되는 바람에 그의 이 전시회조차 취소될 위기를 맞았다. 마침 한선갤러리의 호의로 그의 개인전이 열리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박경희가 자신의 전시회를 위해 준비해온 자료들을 검토할 때만 하더라도 특별히 강렬한 인상을 받지 못한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작품촬영현장에서 그의 원작을 눈으로 보고, 그 개별작품들을 제작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며 필자는 그가 가진 생각이 작품 속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작품속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중요한 소재는 계단의 이미지다. 계단은 외부로부터 내부로의 진입을 매개하는 기구이며 외부로의 외출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또한 계단은 상승에의 욕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은 두껍고 육중한 책의 형상과 그 표면에 새겨놓은 「반야심경」과 계단의 대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불경은 동양적 정신세계, 그 구도적 명상의 세계를 상징하면서 또한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향의 대체물일 수 있다. 그 초월적 세계와 현실의 간극을 연결 시켜주는 것으로서 계단이 도입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계단은 비단 상승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의 많은 작품이 직선형, 나선형의 계단을 수직적 상승구도를 지니고 있는데 어떤 작품에서는 그 계단이 끝나는 지점, 그 정상이 거대한 벽으로 가로막혀 있기도 하다. 그것은 곧 다다를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의 표상이기도 하다. 즉 도 이상의 상승이 무의미한, 그래서 벽이 가로막힌 심리적 동요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장벽은 상승에의 욕망의 종말과 용인되지 않은 전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계단이 끝나고 장벽이 시작되는 부분에 트인 조그만 문을 발견할 때는 그의 재기(材技)조차 읽을 수 있다. 바야흐로 이 계단은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일관되게 딛고 올라서야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덧없는 (장벽으로 가로막힌) 정상을 통과하여 내려가야 하는 생의 지면으로 자리잡는다. 이것은 생의 순환을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우화(寓話)의 시적이고 명상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쉼 없이 올라가야 하는 저 뾰족한 탑은 신의 실존을 확인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세웠던 바벨탑을 연상시켜 준다. 비록 이 작품에서 마지막 계단의 흔적은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끊임없이 나선형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연상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래서 이 탑은 운명적으로 무너져내려야 하는 바벨탑이 아니라 끊임없이 쌓아 올라가야 하는 그 자신의 내면적 욕망의 축적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일상적인 생활과 관념, 소재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흙을 쌓아올리며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가는 노동이 곧 일상인 그에게 이러한 생각과 소재들은 주관적 몰입의 세계로 그를 인도한다. 수평적 병렬과 수직적 팽창, 축적과 응축, 집적과 펼쳐놓음을 통해 그는 그러한 사고(思考)를 시적 정서로 표출하기도 하고 서술적인 줄거리로 풀어놓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파악하고 있는 유미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 아름다움에의 동경과 탐닉은 단순하고 투박한 형태를 통해, 작고 소박하며 꾸밈없는 꿈(희망 혹은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는 현실과 이상, 자아와 객관세계, 감정과 이성이 혼재하고 있다. 그의 유미주의는 예술을 위한 순교자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대립의 해소, 갈등의 용해, 낙관적 인생관에 바탕하고 있는 정서이자 세계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배어있는 그러한 것이라는 점에서 천진함까지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흙을 재료로 한 도조작업(陶彫作業)이 성형으로부터 소성에 이르는 노동의 산물이란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가장 자연적인 소재인 흙이 인간의 손을 거친 후 변화의 용광로(가마)에 던져지는 순간 그것은 새롭게 태어난다.
박경희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현실이 그에게는 이러한 용광로이지 않을까 하고 필자는 나름대로 생각한다. 즉 학교제도란 성형과정(성장과정)을 모범적으로 차분함과 성실성 - 모범생이란 말 속에는 다소 융통성이 없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 으로 보내었다면 이제 그가 꾸려 나가야 할 현재 이후의 시간들은 새로운 탄생을 위해 스스로 자기자신을 불살라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것을 지켜본다는 것은 그 변화를 예감하는 만큼 흥미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최태만 / 토갤러리 큐레이터





공허한 자리(w:120cm, d:35cm, h:35cm)

우리들의 꿈(w:25cm, d:25cm, h:94cm)

장벽을 헤치고(w:54cm, d:25cm, h:43cm)

포근한 안식을 위하여(w:53cm, d:23cm, h:45cm)

어려운 상승(w:16cm, d:17cm, h:48cm)

자유를 향한 날개짓(w:32cm, d:10cm, h:52cm)

과거의 흔적(w:38cm, d:49cm, h:17cm)

많은 희망과 함께(w:32cm, d:33cm, h:45cm)

꼭대기(w:54cm, d:28cm, h:70cm)

진리 속에서(w:26cm, d:20cm, h:30cm)